누가복음 11 : 29~36
딴소리지만 요나가 참 불쌍하다.
하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물고기 뱃속이라니 나는 요나의 마음을 이해한다.
사람들이 불순종이라고 요나를 욕할지언정 나는 요나를 욕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아신 거다.
요나가 도망칠지언정 결국엔 해낼 것이라는 걸 말이다.
불평불만을 쏟고 싫다고 도망가더라도 끝끝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는 걸 아신 거다.
그러니까 요나를 굳이 시키고 물고기 뱃속에 넣었다가 꺼내는 거다.
물론 순종하는 것이 백 번 천 번 옳은 것이지만 요나는 바로 순종하지 못하는 나약한 믿음을 지닌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나는 요나처럼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도 이해 간다.
순종해야 하는 것임을 알지만 그런데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
그걸 뛰어넘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요나는 불평하면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찾아간다.
너무 감정이입이 잘돼서 그런지 몰라도 맨날 도망 다니는 내가 요나같아 그런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요나에게 그 일을 시키듯이 나에게 이 일을 시키는 것엔 이유가 있겠지 하며 오늘도 하기 싫은 마음을 다 잡는다.
등불을 움 속에나 말 아래 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기껏 킨 등불을 숨겨버린다니 바보 같은 짓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걸까?
근데 또 등불을 눈이라고 치환해서 생각하면 그 바보 같은 짓을 내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내 등불을 어디에 두었는가, 내 눈은 어딜 향해 있는가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빛을 좇아야 한다고 되뇌지만 정작 움 속에 있다.
재작년이었던가 하나님에게 그만 보고 싶다고 기도한 적이 있다.
눈을 안 보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만 보고 싶다고 기도했었다.
평생을 그저 눈치가 빠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였나 보다.
그 사실을 그쯤에 알았다. 하나님이 안 보이게 했던 것을 더 보이게 한 뒤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눈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말이다. 근데 너무 버겁더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이자 은혜가 맞는데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다 알게 되어버리니 왜 미디어에서 초능력자들이 그렇게 미치고 팔짝 뛰면서 못된 마음을 갖고 악의 무리가 되는지 이해가 됐다.
버거워서 더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그만 보게 해달라고 말이다.
근데 지금은 하나님께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이기에 괴로울 수 있지만 이제는 그만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 더 많은 것을, 더 큰 것을 보게 되면 작은 것에 조금은 초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빛이 나는 사람이고 싶다. 사람들이 나를 봤을 때 조금은 다르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나에게 다가오는 거는 조금 별로긴 한데 어쨌든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
아직은 그렇게 되기까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하나님의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싶다.
이제는 영의 눈을 더욱더 크게 떠 내 눈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좇고 하나님만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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