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살 무렵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어김없이 선풍기 앞에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아주 불만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오빠는 웃통을 벗고 선풍기를 쐬고 있는데 나는 옷을 꼭꼭 갖춰입고 선풍기를 쐬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옷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아빠의 가르침에 왜 오빠는 예외가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만이 가득담긴 표정으로 요리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엄마 왜 오빠는 위에 옷을 안입는데 나는 입고 있어?"
그러자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럼 너도 벗으면 되지'라고 대답했다.
엄마의 명쾌한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나는 오빠랑 똑같이 웃통을 벗고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런 나의 행동은 아빠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호령과 함께 끝이 나버렸다.
하지만 그 어린 날에 너도 똑같이 하면 되라고 무심히 말하던 엄마의 가르침이 나에게는 진하게 남겨져있다.
여름 휴가로 중국에 여행을 갔을 때 난 또 한번 불만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관광객만 가득한 거리를 거니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다니는 삶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하기에 외지인의 모습을 풀풀 풍기면서 마치 중국인마냥 골목골목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봤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가히 불만스러웠다.
남자는 런닝을 돌돌 말아 가슴과 배 사이에 껴놓고 배가 다 드러나게 입은 채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고 여자는 그 옆에서 위, 아래 옷을 정갈하게 갖춰입은 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왤까?
문화차이에 따른 옷차림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우리 눈에 그 모습은 생소하지만 그 곳의 현지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복식문화 중 하나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왜 여자와 남자의 옷차림에 차이가 있는걸까?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기에 누구에게도 묻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지나왔지만 아직도 내 머리속엔 물음표가 가득하다.
왜 남자는 자유롭게 웃통을 벗는 동안 여자는 모든 걸 갖춰입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웃통을 벗을 수 있는 자유가 여자에게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남에도 아무때나 옷을 벗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다와 같은 곳에서 물에 들어갈 때 남자는 훌렁훌렁 벗어재끼는 윗옷을 여자는 속옷이라도 보일까 옷의 색상까지 신경써가며 꽁꽁 싸매고 들어간다.
가슴이 더 크기 때문에 가슴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이런 논조에서 좀 치워버리고 싶다.
그런건 실질적인 불편함을 가진 '우리'들이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니까 말이다.
훌쩍 커버린 지금 나는 여전히 집에서 웃통을 벗지 못한다.
아빠의 불호령이 없음에도 엄마의 무심한 지지가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다.
내 몸이 밖에 보일까 창문을 꽁꽁, 커튼을 꽁꽁 닫고 숨기며 그렇게 살고 있다.
차이는 차별을 낳아서는 안되는데 여전한 차별 속에서 우리에게 웃통을 벗을 자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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